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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자결2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④ 끝나지 않은 전쟁 1. 폐허가 된 오키나와 오키나와 전투는 전쟁과 상관없는 오키나와 사람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은 지상전이었다. 제32군 사령관 최후까지 싸우라는 말을 남긴 채 자결해 전투는 패전을 선언한 8월 15일 이후에도 9월 7일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희생자는 20여만 명을 넘었는데 이중 민간인은 12만 명이 넘는다. 오키나와 사람 4명의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자 오키나와는 폐허로 변했다. 1944년 10월 10일 이른바 ‘10・10 공습’으로 나하시에 있는 비행장과 항구 등이 파괴되었으며, 시가지는 콘크리트 건물 이외 대부분 가옥이 소실되었다. 사망자도 다수 나왔으며 시가지 90%가 소실되었다. 이후 나하시민은 북부로 피난갔다.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2024. 3. 21.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②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 미군 상륙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미군은 일본군과 오키나와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 미군은 1945년 3월 26일 오키나와 본섬 서부의 케라마(慶良間)제도에 상륙했다. 함대 정박지를 확보한 뒤, 4월 1일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손과 카데나에서 상륙작전을 시작했다. 이곳은 일본군의 비행장이 있는 곳이었다.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한 미군은 54만 명이었으며, 이중 18만 3,000명이 상륙했다. 미군은 다량의 함선과 포탄 11만 발을 발사하며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11만 명이었으며, 이중 오키나와에서 모집한 징집병과 학도병이 2만여 명이었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은 오키나와가 일본군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일본군과 남태평양, 중국 방면의 연결통로였다. 미군.. 2024.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