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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④ 끝나지 않은 전쟁

by 토라노코 2024. 3. 21.

1. 폐허가 된 오키나와

오키나와 전투는 전쟁과 상관없는 오키나와 사람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은 지상전이었다. 제32군 사령관 최후까지 싸우라는 말을 남긴 채 자결해 전투는 패전을 선언한 8월 15일 이후에도 9월 7일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희생자는 20여만 명을 넘었는데 이중 민간인은 12만 명이 넘는다. 오키나와 사람 4명의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자 오키나와는 폐허로 변했다. 1944년 10월 10일 이른바 ‘10・10 공습’으로 나하시에 있는 비행장과 항구 등이 파괴되었으며, 시가지는 콘크리트 건물 이외 대부분 가옥이 소실되었다. 사망자도 다수 나왔으며 시가지 90%가 소실되었다. 이후 나하시민은 북부로 피난갔다.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슈리를 향해 진격했다. 중부전선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며, 슈리성을 향해 20만 발 이상의 포탄을 날렸다. 결국 슈리성과 나하 시가지는 학교 등 일부 콘크리트 건물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2. 아물지 않은 아픔

 

1) 집단자결

오키나와 전투는 ‘집단자결’이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미군에 항복하느니 자결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이었다. 이에지마(伊江島)에서 100여명, 온나손(恩納村)에서 11명, 요미탄손(読谷村)에서 121명, 오키나와시에서 33명, 우루마시(うるま市)에서 14명, 자마미지마(座間味島)에서 234명, 케루마지마(慶留間島) 53명, 도카시키지마(渡嘉敷島) 329명 등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1000명 이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전후 일부 문서에서 일본군이 명령해 수류탄을 건네며 강제로 자살하도록 강요했다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23일부터 미군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26일 케루마지마와 자마미지마에, 27일에는 도카시키지마에 미군이 상륙했다. 그 직후 집단자결이 일어났다. 케루마지마에서 43명, 자마미지마에서 177명, 도카시키지마에서 329명이 자결했다. 특히 도카시키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목숨을 잃은 것은 어린이와 여성, 노인이었다.

 

 

도카시키지마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의 증언을 정리하면,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섬 사람들을 섬 북쪽에 있는 일본군 진지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도카시키지마 촌장이 ‘텐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자 주위 사람들이 복창했다. 그 직후 집단자결이 시작되었다. 좁은 공간 여기저기에서 수류탄 폭발음이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수류탄이 터지지 않아 죽지 않은 사람은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하고, 단검으로 혹은 괭이로 죽이기도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이후 미군이 들이닥쳤다. 살아남은 사람은 미군 수용소로 옮겨졌다.

 

 

2)불발탄

전쟁의 또다른 아픔은 불발탄이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사용된 탄약의 양은 약 20만 톤으로 추정된다. 이중 5%에 해당하는 1만 톤이 불발탄으로 오키나와 전역에 남아 있다. 불발탄은 살상력과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 지금도 오키나와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

 

 

1만 톤에 이르는 불발탄 가운데 미군정이 끝난 1972년까지 주민 등이 약 3,000톤을, 미군이 2,500톤을 처리했다. 1972년 이후 자위대가 2022년까지 2,122톤을 처리했다. 아직도 1,878톤이 오키나와 땅과 바라 어딘가에 매몰되어 있다.

 

불발탄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1974년 3월 나하시 성마태유치원에서 불발탄이 폭발해 유치원생을 포함한 4명이 사망했으며, 34명이 중상을 입었다. 유치원에서는 400여명이 모여 행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폭발음이 진동해 유치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치원 구내에서 작업하던 하수도공사에서 철제 파일을 박은 것이 불발탄을 건드린 것이었다. 일본군이 사용한 직경 72센티의 기뢰였다. 사고 직후 유족과 피해자는 전쟁을 일으킨 국가가 책임이 있다며 손해보상을 요구했다. 사고 발생 9개월 뒤에 책임 소재가 모호한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서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지자체가 불발탄 사전조사와 발굴, 제거대책을 논의하는 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폭발사고는 일어났다. 1987년 나하시에서 1명이 사망했고,1989년에 이에지마(伊江島)에서 1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9년에는 이토만시(糸満市)에서 수도관 굴삭공사 중에 불발탄이 폭발했다. 이후 공공 공사에서 자기탐사 실시가 의무화되었다.

 

3.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전쟁은 끝났지만 오키나와는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1972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오키나와는 미국으로 인식되었다.

 

 

난민이 된 사람들은 미군 수용소에서 식량과 의복을 지급받았다. 식량은 충분하지 않아 부족현상이 계속돼 질병이나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에 미군 식량창고에서 물자를 훔치는 사람도 나왔고, 미군의 총격을 받기도 했다.

 

난민이 된 사람들은 토지로 잃었다. 미군은 광대한 군기지를 차지했다. 군용지 접수는 헤이그육전조약에 의거한 것이지만, 보상이 없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국제법상 전시 점령이 끝났으며, 토지 수용 대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강제적으로 접수한 토지의 임차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통치하는 미국민정부(United States Civil Administration Of The Ryukyu Islands)는 1952년에 계약권을 공표했다. 그러나 연간 토지 임차료는 평당 콜라 1명 값도 되지 않는 헐값으로 20년간 계약이었기 때문에 계약을 나서는 땅주인은 거의 없었다. 미국민정부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더라도 토지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내세웠다.

 

미군정에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은 토지 제공을 거부했다. 이에 미국민정부는 1953년 토지수용령을 공표해 강제로 토지를 몰수했다. 퇴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불도저로 가옥을 밀어붙이면서 강제로 토지를 접수했다. 1954년 미군민정부는 군용지 사용료를 일괄 지급하는 새로운 방침을 발표했다. 토지 사용료를 한꺼번에 지급한 뒤 무제한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오키나와 사람들은 1956년에 들고 일어섰다.

 

이를 ‘시마구루미 투쟁’(島ぐるみ闘争)이라고 부른다. 섬 전체가 하나로 뭉쳐 미군에 대항했다는 것이다. 결국 오키나와 사람은 토지 사용을 인정하는 대신, 미군은 적정 가격으로 차용하는 쪽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이 투쟁은 향후 정치적 움직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