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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① 전쟁의 시작

by 토라노코 2024. 3. 15.

1. 모순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잔혹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1879년 오키나와를 강제 편입한 일제는 동화정책을 밀어붙였다. 일본어를 보급시키고 창씨개명을 단행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일본에서 부르는 태평양전쟁에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제2차 세계전쟁 말기에 오키나와는 미군과 일본군간에 치열한 지상전이 벌어져 20만명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 이중에 절반이 오키나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 본토에서 분리돼 미군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서냉전시대에 오키나와에는 대규모 미군기지가 건설되었다. 중국을 방어하는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와 함께 토지마저 빼앗겼다. 현재도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 중에 74%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오키나와 전투는 한국인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위안부, 강제노역, 학도병 등 현대사의 아픈 상처가 치유도 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오키나와 전투의 시작과 실상,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현대사를 차례차례 정리한다. 우선 슬픔과 아픔, 상처, 모순으로 가득찬 오키나와 전투, 그 시작부터 정리한다.

 

2. 전쟁의 시작

2.1. 진주만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기습적으로 폭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오키나와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패전으로 기운 상황에서 막바지 전투가 벌어져 피해는 막대했다. 이를 '오키나와전', '오키나와 전투'라고 부른다.

 

일본군 전투기의 진주만 공격

 

미영 연합군과 일본군간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3월 26일 시작되었다. 오키나와 본섬은 전쟁터로 변했다. 끊임없는 폭격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6월 23일 씻을 없는 상처와 아픔을 남긴 채 끝났다. 일제는 패전을 선언했다. 일제는 8월 14일 연합국에 패전을 통보하고, 다음날 정오에 일왕은 포츠담선언을 수용하겠다며 항복을 수용했다.

 

2.2. 오키나와, 전쟁 속으로

일제는 1943년에 본토 방위를 위해 확보해야 할 구역으로 '절대국방권'(絶対国防圏)을 획정했다. 홋카이도 동쪽 섬에서부터 마리아나제도, 미얀마에 이르기까지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하 목적으로 선을 그은 것이다.

 

 

또한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키나와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주변 섬을 포함해 10곳에 비행장이 만들어졌다. 1944년 3월에는 일본군이 제32군을 조직해 그해 여름부터 오키나와에 부대를 배치했다.

 

이후 미군은 1944년 6월부터 일제가 점령하고 있던 사이판과 티니안섬, 로타섬을 공습했다. 미군은 남태평양 전투에서 계속해서 승리했으며, 이때부터 일본군의 패색은 짙어졌다. 남태평양에서 승리한 미군은 북쪽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미군이 북상해 일본 본토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오키나와 사람들은 남태평양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 지상전

 

한편 일제는 1944년 7월 오키나와에서 결전을 벌일 것을 상정한 뒤, 군대 식량 확보 등을 위해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린이와 노인을 본토와 대만에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미 제해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선박을 이용한 대피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실제 첫번째 선박에서부터 비극을 불렀다. 1944년 8월 22일 1,700여명을 태운 '츠시마마루'(対馬丸)가 규슈로 향하던 중 미군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했다. 어린이 800여명을 포함해 1,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2.3. 오키나와, 버려지다

이후 오키나와에 미군 공습이 시작되었다. 특히 '10.10공습'으로 불리는 1944년 10월 미군의 나하 공습은 660여명의 희생을 낳았다. 수차례 공습으로 나하시의 90%가 전소되었다. 나하시 이외에 중북부의 요미탄손(読谷村)과 혼부마치(本部町)에도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미군의 상륙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다. 오키나와에는 전쟁의 공포가 확산되었다.

 

 

애초 일본군은 연합군과 오키나와 해상에서 전투를 벌이겠다는 작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황이 급변했다. 1944년 11월 오키나와에 배치된 부대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으로 알려진 제9사단이 갑자기 대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에 오키나와에서 전투력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미주리호

 

일본군은 작전을 변경해 상륙한 미군을 오키나와에 묶어 두는 정기전을 계획했다. 이를 통해 일본 본토에서 전면전을 늦추는 대신, 오키나와는 본토를 지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를 바둑용어를 빌려 '사석', '버림돌'이라고 부른다. 오키나와는 버려진 땅이 되었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쟁터에 내몰리게 되었다.

 

3. 지상전의 시작

미군의 오키나와 공격이 예상되자 일본군은 본섬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용기한 산호초 지형에 동굴진지를 수없이 판 뒤, 진지전에 돌입했다. 미군은 1945년 3월 26일 진공작전을 시작했다.

 

 

미군은 3월 26일 오키나와 서쪽에 위치한 자마미지마(座間味島)과 도카시키지마(渡嘉敷島)에 상륙했다. 4월 1일에는 본섬 중부의 요미탄손과 가데나에 상륙했다.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슈리(首里) 근방에서 피로 물든 격전이 벌어졌다.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을 양분해 진격했다. 일본군은 5월 4일 총공세에 나섰지만 패배했다. 결국 5월 하순에 슈리 사령부를 버리고 남부지역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후퇴하면서 비인간적인 잔행을 저질렀다. 야전병원과 사령부에 수용된 부상병을 독살시켰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에는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