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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③ 전쟁에 내몰린 한국인

by 토라노코 2024. 3. 18.

1. 들어가며

오키나와 전투는 민간인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은 지상전이었다. 희생자는 20여만 명에 이른다. 이중 일본군 전사자는 6만 6,000명, 미군 전사자는 1만 2,500명이었으며, 민간인은 12만 2,000명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한국인의 희생도 컸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징병자와 군부, 위안부, 학도병 등 적게는 2,800명에서 많게는 1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 강제징용・징병자: 전쟁에 내몰린 한국인

1) 강제징용・징병자

오키나와에 끌려온 한국인은 오키나와 수비군 제32군에 배속되었다. 실제 조선인 징용・징병자수는 제각각이다. 일본정부가 한국정부 전달한 ‘조선인 징용・징병자 명부’(26만 명)를 바탕으로 집계한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조선인은 육군에 3,191명, 해군에 272명으로 합계 3,463명이다. 이중 사망이 확인된 수는 492명이다.

 

 

이는 명부에 기재된 최저 동원수에 해당한다. 명부에 기재되지 않았거나 명부 자체가 없는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실제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와 강제노역에 동원된 수까지 계산한다면 적게는 10,000명에서 많게는 2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있는 한국인 위령탑에는 10,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2) 군부

군대의 인부, 줄여서 ‘군부’로 불린 이들은 강제노동과 노역에 동원되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다. 오키나와에서 군부는 비행장 건설, 기지 건설, 진지구축, 탄약 운반 등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 상륙을 감행한 요미탄손에는 조선인 군부와 강제동원된 오키나와 민간인이 건설한 키타 비행장이 있었다. 이 비행장은 태평양전쟁이 미국으로 기울기 시작한 1943년 10월에 건설되었다. 73만평에 이르는 면적에 2,000미터 활주로 두개를 세웠다. 아직도 활주로 윤곽과 격납고가 남아 있다.

 

키타 비행장에서 가까운 해변에는 동굴형 비밀기지가 있다. 미군 함대와 구축함을 공격하는 잠수정과 인간어뢰가 잠복한 기지였다. 한국인 군부도 비밀기지 건설에 동원되었다.

 

미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시작된 케라마제도의 아카시마(阿嘉島). 1945년 2월 아카시마에 한국인 150여명이 끌려왔다. 배치된 곳은 해상공격정부대였다. 한국인 군부 중에 7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군부가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속에 굴을 판 뒤, 강제로 가두었다. 이들은 미군의 함포사격이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미군에 항복하기 위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사살된 경우도 많았다.

 

 

3) 카카즈 전투와 조선학도병

오키나와 중부 기노완시에는 ‘청구의 탑’(靑丘之塔)이 있다. 오키나와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해 전투가 벌어졌던 카카즈(嘉数)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학도병 등을 기리는 탑이다. 카카즈 전투는 1945년 4월 8일부터 16일간 벌어졌다. 일본군 주력군 제32군은 오키나와 남부에 진지를 구축한 뒤, 슈리 인근 고지에서 격전을 벌였다.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미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군이 정면으로 맞붙은 것이다.

 

 

미군은 탱크를 앞세웠고 일본군은 대전차지뢰와 육탄공격으로 맞섰다. 이 전투는 일본군 전사자와 부상자 수가 64,000명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48,000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는 24,000명으로 추정된다(12,000명으로 보기도 한다).

 

카카즈 전투는 ‘죽음의 덫’이라고 한다. 이러한 혈투에서 군부로 끌려온 조선학도병 등은 진지 구축을 위한 벌목과 운반 등의 노역에 시달렸으며, 탄약운반과 진지 구축에 동원되었으며, 최후에는 인간 방패로 내몰렸다. ‘청구의 탑’은 이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으로 1971년에 세워졌다. 카카즈 전투 등에서 목숨을 잃은 한반도 출신자 386명을 추도한다는 비문이 적혀 있다. 그러나 자세한 경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일제는 1943년부터 학도동원령을 실시해 징집했다. ‘학도출진’(学徒出陣)으로 불린 학도병은 기만적인 방법으로 모집되었는데, 그 수는 4,385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오키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학도병은 740명이다. 이를 위로하기 위한 위령탑이 1975년에 오키나와에 세워졌다. 이후 2013년 11월에 제주국제평화공원으로 옮겨졌다.

 

4) 일본군 위안부

한편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곳곳에 위안소를 세웠다. 한반도와 중국 등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성노예)로 위안소에 배치되었다. 각 부대의 후방시설로 위안소가 설치되었으며, 민가 등이 이용되었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위안소만 130여 곳이나 있었으며, 한반도 출신자로 만들어진 위안소가 41곳이었다. 위안부는 부대와 함께 이동했기 때문에 참혹한 고통을 받았으며,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오키나와에 설치된 위안소 지도(출처: WAM, wam-peace.org)

 

처음으로 위안부였음을 증언한 사람은 배봉기 할머니였다. 배 할머니는 1975년에 언론에 오키나와에 끌려온 위안부였다고 증언했다. 배 할머니는 1944년에 오키나와에 끌려 왔으며, 조선인 여성 6명과 함께 도카시키시마(渡嘉敷島)에 있는 위안소에 끌려 갔다고 폭로했다. 위안부 관련된 자세한 데이터는 비영리법인 WAM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日本軍慰安所マップ

証言,公文書等,様々な文書を徹底調査

wam-peace.org

 

3. 나오며

오키나와 전투는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전쟁의 모순은 그것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일본군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난 듯 했지만,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27년간 미군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오키나와에는 여기저기 미군기지가 건설되었다. 새로운 모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