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군 상륙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미군은 일본군과 오키나와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 미군은 1945년 3월 26일 오키나와 본섬 서부의 케라마(慶良間)제도에 상륙했다. 함대 정박지를 확보한 뒤, 4월 1일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손과 카데나에서 상륙작전을 시작했다. 이곳은 일본군의 비행장이 있는 곳이었다.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한 미군은 54만 명이었으며, 이중 18만 3,000명이 상륙했다. 미군은 다량의 함선과 포탄 11만 발을 발사하며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11만 명이었으며, 이중 오키나와에서 모집한 징집병과 학도병이 2만여 명이었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은 오키나와가 일본군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일본군과 남태평양, 중국 방면의 연결통로였다. 미군은 이를 끊은 뒤,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고자 했다. 미군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에 일본군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밀렸다.
최정예부대로 알려진 제9사단을 대만으로 보낸 제32군은 해상전에서 막겠다는 전략을 수정해 오키나와 본섬에서 지구전으로 버티는 작전으로 변경했다. 이를 통해 미군의 본토 공격을 늦춰 본토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자 했다.
2. 오키나와 지상전
1) 오키나와 북부 게릴라전
미군의 상륙으로 오키나와 본섬의 일본군은 남북으로 갈리게 되었다. 북부에서는 유격대가 배치되었지만, 미 해병대의 맹공으로 패잔병처럼 피난민의 식량을 약탈하며 도망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북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대형 비행장이 있는 이에지마(伊江島)였다. 일본군 2,700명은 동굴에 숨어 6일간 치열하게 저항했다. 이 전투에서 주민을 포함해 3,500명이 전사했다. 일본군이 집단자결을 명령에 목숨을 잃은 주민이 100명을 넘었다. 이에지마를 점령한 일본군은 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주민을 케라마제도로 내보냈다.
2) 민간인마저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지상전
미군에 밀려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5월 1일에 총공세를 벌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피 비린 내 나는 격정이 벌어졌다. 5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지휘부가 있는 슈리까지 밀렸다.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미군의 본토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시간벌기 지구전을 고집해 전사자와 주민의 희생이 부풀어 올랐다.
일본군 제32군은 류큐국의 왕궁이었던 슈리성 지하에 비밀 진지를 구축한 뒤, 군사작전을 짜고 명령을 내렸다. 5월 하순에 미군은 슈리성 코앞에 이르렀다. 결국 5월 22일 제32군은 슈리 사령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뒤, 27일 남부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자연동굴이 많은 남부에서 최대한 버티겠다는 전략이었다.
일주일만에 철수를 마무리했지만, 일본군은 슈리에서 철수하면서 야전병원에 수용된 부상병 가운데 움직이지 못하는 중상병을 수류탄과 약물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부상병이라도 미군의 포로가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결정 때문이었다. 중상병에게 청산가리를 투여하는가 하면, 약물을 거부할 경우에는 총검으로 살해했다. 이렇게 자국 병사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망자가 1,000명을 넘었다.
3) 아비규환으로 변한 남부 전투
오키나와 남부는 제32군과 피난민으로 밀집되었다. 미군은 6월 7일부터 탱크를 앞세워 화염방사기 등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과 피난민이 숨은 동굴에 폭탄을 발사해 파괴했다. 게다가 바다에서는 함포사격이, 하늘에서는 폭격과 기총사격이 계속되어 오키나와 남부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일본군은 남부에서도 약탈과 주민 학살은 자행했다.
후퇴를 거듭하던 제32군은 남부 해안선 절벽에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은 미군은 6월 17일 1시간 동안 포격과 발포를 멈춘 뒤, 제32군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満) 사령관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령관은 이를 무시했다. 게다가 18일 미군 오키나와 점령부대 총사령관 버크너(Buckner) 중장이 전사하자 미군은 보복공격을 시작해 무차별 살육이 시작되었다. 6월에 희생자는 4만 7,000명을 넘었다. 결국 일본군 제32군 사령관은 최후까지 싸우라는 말을 남기고 6월 23일 참모장과 함께 자결했다.
이후 제32군은 와해되었지만, 자결하며 최후까지 싸우라는 사령관의 말은 전쟁 종식을 늦추게 만들었으며, 피난민의 희생을 불렀다.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은 사령관이 자결한 지 2달 보름이나 지난 9월 7일이었다. 포츠담선언을 수용해 패전을 인정한 8월 15일 이후에도 남부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한편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정규군뿐만 아니라 학도병도 동원되었다. 정규군으로 징집된 병사뿐만 아니라 병역에서 제외된 17세 이상 45세 미만 남자는 방위대에, 중학생 이상 남녀 학생은 학도병에 편성되었다. 학도병 소집은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자원에 의한 의용병 형식을 빌렸지만, 실상은 강제 동원이었다.
남자학도병은 통신병이나 게릴라에 투입되었으며, 처참한 희생이 뒤따랐다. 여자학도병은 야전병원에 배치돼 부상병 간호와 사체 처리, 노역 등에 동원되었다. 오키나와에서 동원된 학도병 가운데 남녀 981명이 목숨을 잃었다.
3. 오키나와 전투: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전투였나
오키나와 전투는 주민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은 일본에서 유일한 지상전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일본군 전사자는 6만 6,000명, 미군 전사자는 1만 2,500명이었다.
민간인에서는 오키나와 주민이 9만 4,000명, 오키나와 출신 군인과 군속이 2만 8,000명으로 합계 12만 2,000명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한국인의 희생도 있었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사람과 학도병 가운데 3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자는 군인이나 군속보다 민간인이 훨씬 많았다. 일반 주민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 넣었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총알받이로 쓰였으며,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희생도 컸다. 일본군의 학살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도 적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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