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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오키나와 류큐왕국 삼별초 홍길동

by 토라노코 2024. 3. 12.

1. 들어가며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에는 오키나와 관련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류큐왕국의 정치와 문화,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과 류큐왕국은 교류가 빈번했다. 특히 장헌공은 오키나와에 도자기 기술을 전수했으며, 이는 류큐자기(도자기)를 발전했다.

 

 

역사적 기록 이외에 확인되지 않은 부분도 남아 있다. 오키가와가 삼별초나 홍길동전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은 추측의 영역에 속하며 고증이 필요하다.

 

2. 오키나와와 삼별초

1) 삼별초: 난인가 항쟁인가

삼별초와 오키나와 삼별초의 항쟁 13세기 말에 고려는 원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게 된다. 삼별초는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다. 원래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으로 군부정권의 호위병이었다. 몽골이 쳐들어오자 최씨 무신정권은 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해 몽골과 항전했다.

 

그러나 지방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무신정권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왕은 원종이었다. 원종은 무신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뒤, 1270년에 삼별초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대몽 항쟁을 벌였지만, 이후 함선 1000여 척을 모아 강화도에서 서해를 거쳐 진도로 후퇴했다.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구축하며 항쟁을 계속했다. 한때 진압군과 대치하며 제주도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2) 삼별초의 최후

그러나 1271년에 진압군은 세 방향으로 총공세를 벌였다. 결국 진도는 함락당했으며, 배중손은 전사했다. 이후 남은 병사는 김통정의 지휘하에 탐라(제주도)로 퇴각했다. 제주도에서 재정비한 삼별초는 항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원나라와 진압군이 총공격을 감행해 1273년에 몰락하게 되었다.

 

3) 삼별초와 오키나와

삼별초는 진도에서 완전히 몰락했지만, 류큐왕국으로 후퇴했다는 주장도 있다. 12세기 말까지 오키나와는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는 카이즈카 시대였다. 이후 13세기부터 성곽을 중심으로 초기 국가를 형성하는 구스크 시대를 맞이한다. 이 과정에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들어온 삼별초 병사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증거가 없이 주장만 있었다. 그런데 2000년을 전후해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정부는 슈리성을 포함한 성터(구스크)와 유적지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 신청하기 위해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삼국이 경쟁하던 산잔 시대에 왕국와 성터인 우라소에(浦添) 성터와 능묘인 우라소에 요도레(浦添ようどれ)에서 고려시대의 기와와 와편이 발견되었다. 이는 진도의 용장산성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수막새 기와가 발견되면서 삼별초와 관련성이 높아졌다. 기와와 와편에 사용된 흙은 오키나와의 흙이었다.

 

3. 오키나와와 홍길동전

1) 홍길동전

허균의 '홍길동전'도 픽션의 영역에서 역사의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홍길동전'은 완전한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설에서 시대적 배경은 세종 시대로 설정했다.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허균(1569~1618)은 1594년에 과거에 급제한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기도 했다. 관직에 올랐지만 탄핵과 파면, 복직을 했다. 그러나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반대해 혁명을 계획했지만, 반역으로 몰려 능지처함을 당했다.

 

허균은 반체제인사였으며 그가 지은 문집도 불온서적으로 분류돼 모두 불태워질 뻔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외손자 이필진에게 건네줘 보존되었다.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되었지만, 뒤에 문신 유몽인이 허균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지은이를 알게 되었다.

 

소설은 세종 때 좌의정 홍상직의 얼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무예와 학식이 뛰어났지만, 얼자로 태어나 뜻을 펼치지 못한다. 이에 가출하여 도적의 우두머리가 된다. 무리의 이름은 할빈당으로 짓고 탐관오리와 타락한 승려를 징벌해 이름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홍길동을 잡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다.

 

홍길동을 잡을 수 없자 회유해 병조판서를 제수한다면 조정에 불러 들인다. 왕 앞에서 홍길동은 제수를 거절하고 할빈당을 이끌고 떠나겠다고 알린 뒤, 어머니와 무리를 이끌고 율도국에 가서 나라를 세운다.

 

2) 홍길동전 논란

'홍길동전'은 허균이 자신의 모민론에 의거해 전략적으로 기획한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저자 문제, 최초의 한글소설 여부, 율도국 실존 문제 등 논란이 계속되었다. 이중에 율도국 관련 논란은 율도국이 류큐왕국이라는 주장도 있고, 일부에서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라는 주장도 있다.

 

3) 율도국과 류큐왕국

율도국이 류큐왕국이 아니냐는 주장은 아직은 설에 불과하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은 시키가기지마의 야에야마 박물관에 있는 홍길동 처남의 족보인 장정대주에 홍길동이 1443년에 전라남도 장순군 활용면 아치실에서 태어났는 기록이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1501년 홍길동은 하테루마지마에 정착해 홍가와라라는 이름으로 살았다고도 한다. 16세기에 오키나와에서 의적으로 활동한 사람의 별명이 홍 가와라였으며 홍길동과의 관련성을 두고 있다. 이헤루마지마에는 홍길동이 홍길동 도래 기념비가 있고, 홍길동이 어머니와 이별해 이시가키지마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는 모자이별 제단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야코지만에는 홍길동 쌓았다는 성터와 사당도 있고 한다.

 

4. 나오며

하테루마지마와 이키가기지마, 미야코지마는 본섬에서 떨어진 곳이다. 본섬과는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다. 홍길동이 류큐왕국이 아니라 이들 섬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삼별초나 '홍길동전'은 아직 확인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