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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오키나와 반환과 밀약

by 토라노코 2024. 3. 26.

1. 오키나와 반환

1.1. 반환운동

미군정의 토지 몰수에 대항해 오키나와 주민이 단결해 대항한 ‘시마구르미’(島ぐるみ) 투쟁 이후 일본 복귀운동이 거세졌다. 패전 당시에는 미국에 귀속을 원하는 여론과 오키나와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일본 복귀가 지배적인 여론이 되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베트남 전쟁이 터지자 출격기지와 후방지원기지로 변했다. 이후 오키나와에는 막대한 달러가 유입되었으며, 특수를 누리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오키나와가 다시 전쟁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터져 나왔다.

 

 

특히 1965년 이후 미 폭격기 B52가 태풍을 이유로 괌에서 카데나(嘉手納)로 옮겨 직접 출격하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카데나가 베트남으로 출동하는 전투기의 출격기지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미 투쟁은 격화되었다.

 

1.2. 미일 반환협상

1960년대 후반 이후 오키나와 반환은 미일간 중요한 외교문제로 부상했다. 그러나 양국간의 의도는 달랐다. 미국은 패전 이후 경제성장을 이루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군사적 역할을 원한 반면, 일본은 오키나와 반환운동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오키나와 주민은 ‘즉시, 무조건, 전면 반환’을 요구했지만, 미일 양국은 오키나와를 태평양의 요새로 설정하고 미군기지 유지를 조건으로 내세운 ‘시정권’(施政権) 반환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1969년 11월에 발표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1972년 반환을 결정했지만, 그 전제는 어디까지나 미군기지 존속이었다.

 

1.3. 코자 사건

이러한 상황에서 반환운동을 촉발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12월 오키니와시 코자(コザ)에서 미군병사가 2건의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미군병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건 처리에 불만이 폭발했다. 이를 ‘코자 폭동’, ‘코자 반미 사건’으로 부른다.

 

 

미 헌병이 위협사격을 하자 순식간에 몰려든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 차량을 뒤엎고 불을 질렀다. 5,000여명이 모였으며, 미군 기지로 돌진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과 무장한 미군이 출동해 진압에 나섰지만, 미군 차량 73대와 기지내 건물이 불탔다.

 

2. 오키나와 반환협정

오키나와 주민은 ‘핵도 기지도 없는 평화로운 섬’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일간 반환협상은 미군기지를 유지한 채 ‘비핵, 본토와 동등, 1972년 반환’으로 기울었으며, 1971년 6월에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총리가 오키나와 반환협정에 조인했다. 이 조약은 전문 9조로 구성되며, 부속문서 6개가 붙었다. 미일간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

 

  • 오키나와 시정권을 일본에 반환한다.
  • 반환 후 오키나와에 안보조약을 포함한 미일간 조약 및 협정을 적용한다.
  • 현재 미군기지의 대부분을 미군에게 계속해서 제공하고 기능을 유지한다.
  • 일부 축소되는 기지기능은 자위대로 보완하고, 안보조약 제6조에 의거해 미군 상호방위체제를 강화한다.
  • 오키나와 주민이 대미 청구권을 원칙적으로 포기한다.
  • 오키나와 미군의 자산을 넘겨주는 대가로 일본이 3억 2,000만 달러를 지불한다.
  • 재판의 효력을 원칙적으로 계승한다.
  • 오키나와의 VOA(Voice of America) 통신소는 반환 후에도 잠정적으로 유지한다.

 

미군기지는 존속한다고 규정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기지에 관한 양해각서’라는 이름으로 국회 비준이 필요하지 않은 양해각서의 형태로 결정되었다. 상당한 모순과 문제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반환협상에서 미국은 유사시에 오키나와에서 핵무기 사용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정부가 내세우는 ‘비핵 3원칙’과도 충돌한다.

 

 

3. 오키나와 밀약

3.1. 밀약의 존재

오키나와 반환을 두달 앞둔 1972년 3월에 일본 국회에서는 야당이 오키나와 반환과 관련된 미일간 밀약이 있었다며 정부를 추궁했다. 이는 마이니치신문의 니시야마 타키치(西山太吉) 기자가 외무성 여성 사무관으로부터 기밀문서를 입수해 보도했으며, 국회의원에게도 넘겼다. 이를 ‘오키나와 밀약’(沖縄密約) ‘니시야마 사건’(西山事件)이라고 부른다.

 

 

사토 총리는 오키나와 반환협정을 발표하면서 미국이 지권자에게 부담해야 할 토지 원상 회복비 4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미국을 대신해 부담한다는 내용의 밀약이 있었다. 당시 외무성을 취재하던 니시야마 기자는 외무성 심의관 소속 여성 사무관으로부터 기밀 전신문을 입수했다. 니시야마 기자는 이를 야당 국회의원에게 제공했으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이를 폭로해 사토 내각을 공격했다.

 

3.2. 언론자유 대 국가기밀

사토 내각은 밀약을 부인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여성 사무관을 국가공무원법의 기밀누설죄로, 니시야마 기자는 교사죄로 체포, 기소했다. 1974년 1심인 도쿄지방법원은 니시야마 기자에게 무죄를, 여성 사무관은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여성 사무관은 항소하지 않아 확정되었다. 니시야마 기자는 1976년 2심인 도쿄고등법원에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다.

 

이 사건은 기자가 취재활동으로 체포되고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점에서 취재의 자유와 알권리의 관점에서 다양한 논쟁을 불렀다. 국가기밀이란 무엇인가, 기자에게 국가공무원법을 적용할 수 있는가, 취재활동에 제한이 있는가 등이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도쿄지검의 프레임이었다. 기소장에 ‘여성 사무관에게 몰래 정을 통하고 이를 이용해’라고 쓰자 여론은 남녀간의 스캔들로 기울었다. 주간지 등에서 스캔들 보도가 잇따랐으며, 밀약 자체보다는 선정성으로 흘렀다. 마이니치신문은 취재윤리로 비판을 받았다. 검찰은 국가기밀 누설혐의로 기소했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밀약의 존재여부가 규명되지 않았다.

 

 

4. 모순의 계속

진실은 긴 시간 뒤에 찾아온다. 밀약의 존재는 2000년 5월 미국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공문서가 발견되면서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2009년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2010년에 오키나와 반환 당시의 외교문서 공개를 결정했다. 이에 따르면 ‘미정부가 부담해야 할 미군기지 시설개량비 6,500만 달러 대납 밀약’이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일협상에 참여했던 외무성 미국국장도 밀약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1972년 5월 오키나와 주민들이 원하는 반환이 이루어져 오키나와는 27년 만에 일본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미군정 시대나 미일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모순은 반환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