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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오키나와 반환과 국제해양박람회, 추라우미수족관

by 토라노코 2024. 3. 28.

1. 반환 직후 여론

1972년 5월 오키나와의 시정권(施政権)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 반환 혹은 복귀 직후 지방의회선거가 실시되었다. 지방정부와 지방경찰도 출범했다. 자위대도 주둔했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군’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반환 전후에 여론은 좋지 않았다. NHK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반환 직전인 1970년에 본토 복귀를 원한다는 응답은 85%이었지만, 복귀 직후인 1972년에 51%로 감소했으며, 1973년에는 38%까지 급감했다.

 

 

닉슨 쇼크

이유는 1971년 닉슨 쇼크(Nixon Shock)로 인한 환율변동과 물가상승으로 불만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반환 이후 화폐는 달러에서 엔화로 바뀌었으며, 오키나와 사람들과 기업은 보유한 달러를 엔화로 교환해야 했다. 그러나 변동환율로 변하면서 엔화가 강세로 돌아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손해를 보게 되었다. 물가 표시도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물가도 상승했다.

 

오키나와 개발계획

이에 일본정부는 복귀 이후 오키나와 경제를 본토와 동등하게 발전시킨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진흥정책을 추진했다. 건설업을 중심으로 집중 투자했으며, 관광산업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정부는 오키나와와 본토와의 격차를 줄이고 원만한 제도이행을 위해 복귀특별조치와 오키나와개발3법을 제정했다. 또한 10년을 단위로 오키나와진흥개발계획을 마련해 실시하게 되었다.

 

2. 오키나와국제해양박람회

복귀 기념사업

일본정부는 오키나와 반환을 기념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기념식수, 국민체육대회, 오키나와국제해양박람회은 3대 기념사업으로 꼽힌다. 기념식수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오키나와 남부 이토만시(糸満市)에서 개최되었다. 국민체육대회는 ‘강하게, 밝게, 새롭게’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특별대회로 오키나와 전역에서 치러졌다.

 

 

오키나와국제해양박람회

한편 오키나와국제해양박람회(이하 해양엑스포)는 1975년 7월부터 ‘바다: 그 소망의 미래’를 주제로 북부 모토부초(本部町)에서 6개월간 개최되었다. 일본을 포함한 세계 36개국과 3개 국제기구가 참가해 당시에 최대 규모로 개최되었다.

 

 

전시회와 이벤트, 심포지엄, 태평양 횡단 요트레이스, 세계 각국의 전통예능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다. 박람회장은 100만 제곱미터였는데 이중 25만 제곱미터가 바다였다.

 

특히 주목을 큰 것은 ‘아쿠아폴리스’였다. 이는 해양엑스포의 심볼로 해양도시를 상상해 만든 반잠수형 구조물이었다. 연출은 ‘우주소년 아톰’으로 유명한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담당했다. 123억 엔을 들여 면적 10,400제곱미터, 높이 32미터의 해양도시를 만들었다. 해양엑스포 기간동안 200만 명이 방문했다

 

해양엑스포의 상징 아쿠아폴리스(출처: https://www.sci.u-ryukyu.ac.jp/?page_id=1563)

 

해양엑스포를 계기로 오키나와는 도로가 우선 정비되었다. 현재 오키나와 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이 완공되었으며, 국도도 확장되었다. 호텔닛코 나하 그랜드캐슬와 오키나와 하버뷰호텔 등의 대형 호텔이 들어섰으며, 나하타워 등의 관광시설도 세워졌다. 호텔닛코는 현재 더블트리 힐튼으로 바뀌었으며, 나하타워는 2014년에 해체되었다.

 

오키나와는 옛날부터 바다 건너에 '니라이 카나이'(ニライカナイ)라는 이상향이 있다고 믿었다. 이에 해양엑스포에 대한 기대로 컸다. 그러나 엑스포가 다가오면서 본토기업의 토지 매점, 물가상승, 환경파괴 등이 부각되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생활을 뒷전으로 밀리고 기업 중심의 개발에 치우치게 되었다. 이에 엑스포를 반대하는 운동도 일어났다.

 

해양박람회 후유증

해양액스포 입장객은 애초 500만 명을 예상했지만 최종 입장객은 349만 명에 머물렀다. 해양엑스포를 노린 투기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대형호텔 이외에 해양엑스포를 내다보고 건설한 지역 자본이 중소호텔과 민박, 기념품점 등은 경영부진에 빠졌다. 해양엑스포 이후 도소매와 건설, 제조, 서비스 등 거의 모든 업종에서 도산이 잇따랐으며, 고물가와 실업 등의 엑스포 후유증을 앓았다.

 

 

박람회장은 현재는 국영 오키나와 해양엑스포 기념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해양식물관은 수족관으로 바뀌었다. 노후화로 2002년에 재건축을 거쳐 오키나와 츄라우미 수족관(沖縄美ら海水族館)이 되었다.

 

해양엑스포의 상징이었던 아쿠아폴리스는 1976년 3월에 오키나와현에 2억 엔에 넘겨졌다. 영업을 계속했지만, 1993년 11월에 폐쇄되었다. 이후 2000년에 미국기업에 1,400만 엔에 매각되어 해체작업을 위해 상하이로 옮겨졌다.

 

 

해양엑스포 이후 오키나와는 관광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광산업은 본토 대기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현재도 현지 자본보다는본토나 해외 자본으로 건설된 호텔이 다수이다.

 

교통시스템 개혁

한편 오키나와 반환 이후 교통시스템도 바뀌었다. 미군 점령하에서는 차량의 우측통행은 1978년에 개정되었다. 교통시스템의 개혁에 맞춰 도로표지 교환, 버스 정류장 변경, 차량 교체, 시설 정비 등으로 400억엔이 들어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는 여전히 교통정체가 극심하며 추가적인 도로정비가 필요한 상황이다.

 

 

3. 오키나와의 현실

 

1972년 5월 반환 이후 오키나와는 급속하게 일본으로 동화되기 시작했다. 한때 류큐 독립을 외치는 세력도 있었지만 반환 과정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또한 현실은 여전히 모순을 안고 있다. 주일 미군기지의 70%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으며, 오키나와 본섬의 14.5%를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다. 미군이 일으키는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도 크다.

 

 

경제적인 상황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키나와의 최저임금은 전국에서 가장 낮아 최저시급은 2023년에 896엔이었다. 1,113엔인 도쿄보다 216엔이 낮다. 1인당 소득도 도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실업률도 전국에서 가장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