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즈카 시대와 구스크 시대를 거쳐 1429년에 류큐왕국이 성립되었다. 일본에 편입된 1879년까지 450년간 오키나와의 왕정체제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에는 유구국(琉球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류큐왕국의 흥망사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류쿠왕국의 성립
구스크 시대는 농경사회로 변모하고 대외교역이 늘어나면서 생산성이 높아졌으며, 자연히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지(按司)로 불리는 호족이 나타났고, 세력다툼을 거듭하며 세력을 키워갔다. 북부와 중부, 남부로 세력이 집중되는 산잔 시대를 맞이했다. 이후 1429년에 쇼하시(尚巴志)가 세력을 규합해 통일하게 되었다. 이렇게 류큐왕국이 탄생했다.
쇼하시가 제1대 왕에 등극했지만, 여전히 지방의 아지는 세력이 강했다. 왕권은 약해 내란이 끊이지 않았다. 통일 왕조가 성립된지 40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1469년에 북부 작은 섬의 농부 출신 카나마루(金丸)가 정권을 장악해 새로운 왕조가 탄생했다. 카나마루는 명나라를 의식해 이전 쇼왕조를 계승해 쇼엔왕으로 지칭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카나마루의 정권교체 이전을 제1 쇼씨 왕조, 이후를 제2 쇼씨 왕조로 부른다. 이러한 분류방식은 류큐왕조를 폄훼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성(姓)으로 왕조를 분류하는 것은 통치철학이나 이념보다는 인물에, 그것도 씨족으로 왜소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일본 역사학계가 조선시대를 이씨조선으로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무튼 카나마루 왕조는 19대의 쇼타이(尚泰)까지 400여년간 지속되었다. 류큐왕국은 중국 명나라를 비롯해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외교, 무역을 통해 해양국가로 발전해 갔다. 슈리성(首里城)은 해양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류큐 침공
1609년에 가고시마현을 지배하던 사쓰마번(薩摩藩)이 류큐왕국을 침공했다. 임진왜란에 출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琉球王国)는 명나라를 공격한다며 길을 열어달라며 조선을 침공했을 때 류큐왕국에도 출병과 군량미를 요구했다. 류큐왕국은 재정상황과 명나라의 책봉국이라는 상황 등을 고려해 요구한 군량미의 절반을 제공했다. 나머지는 싸쓰마번에서 부담했다.
사쓰마번은 1609년에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류큐왕국을 공격했다. 사쓰마번은 3주만에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4주만에 슈리성까지 들이닥쳤다. 류큐왕국은 사쓰마번보다 많은 4,000명의 군사가 대항했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이후 류큐의 왕은 사쓰마번의 부속국이라고 적히 문서를 사쓰마번에 제출하도록 했으며, 15조 준수사항을 수용하도록 했다. 이후 류큐왕국은 사쓰마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류큐왕국은 사쓰마번에게 조공을 바쳤고, 왕자는 볼모로 사쓰마번에 보내야 했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었으며, 류큐왕국은 계속해서 청나라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사쓰마번 침공 이후 270년간 류큐왕국은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사쓰마와 도쿠가와 막부의 종속국이라는 모순된 존재였다.
류큐 처분
류큐 침공 이후 류큐왕국은 명나라(이어 청나라)의 책봉국이면서도 사쓰마번의 속국이라는 이중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탄생이 일본제국은 1879년에 청나라의 책봉체제를 없애고 오키나와현으로 편입시켰다. 이를 위해 1872년에 먼저 류큐번을 만들었으며, 1879년에는 류큐왕국은 일본에 통합, 합병되었다. 일본제국은 군대를 파견해 슈리성에서 쇼타이왕을 내쫓았다. 이를 류큐 처분, 류큐 합병, 오키나와 합병으로 부른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류큐 처분은 일본이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영토 획정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제국은 치멸한 계획 속에 류큐왕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1871년이다. 당시 류큐인이 대만에 난파되었는데, 이중 수십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제국은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청나라와의 협상에서 일본제국은 류큐가 오랫동안 사쓰마에 속해 있었다면 일본이 다시 관할할 것이니 손을 떼라고 요구했다.
1872년에 사쓰마번의 채무를 없애는 대신 류큐정부가 메이지유신을 축하는 전문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에 류큐정부는 도쿄에 외교사절을 파견했다. 일본제국은 류큐왕국을 '류큐번'으로 바꾸고 쇼타이왕은 '류큐번왕'으로 칭했다. 이는 류큐왕국이 일본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의례였다.
이후 일본제국은 1874년에 대만에서 류큐인 학살을 이유로 대만 원정에 나섰다. 영국은 중재에 나섰으며, 결국 청나라는 배상금을 내기로 했으며 류큐인을 일본국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1875년 일본제국은 류큐 처분을 결정해 70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해 9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핵심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일본군의 주둔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1976년에는 나하에 군대를 파견했다. 류큐정부는 청나라에 밀사를 보내지 일본제국의 간섭을 알렸다. 도쿄에 파견된 류큐정부 대표는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 일본제국의 부당한 지배를 알리고 원조를 요청하고, 일본제국에는 이전 체제의 복귀를 요구했다. 이어 1789년에 일본제국은 경찰관 군인을 이끌고 슈리성에 들이닥쳤다.
나오며
류큐왕국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속수무책으로 일본제국에 복속되었다. 다음에는 류큐왕국은 어떤 나라였는지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다. 오키나와에 대한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들 역사서이다. 다른 사료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숨기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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