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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에 비친 류큐국

by 토라노코 2024. 3. 8.

류큐국은 1429년에 탄생했지만, 그 이전부터 고려, 조선과 교류하고 교역을 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1371년부터이다.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인 창왕 시대인 1389년 8월에는 산잔(三山) 시대에 중부지역을 지배한 쥬잔(中山)의 왕 삿토(察度)가 조공을 바쳤으며, 왜구에 잡혀간 류큐인의 송환했다는 기록이 있다.이러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또한 해동제국기에도 류큐국에 대한 설명과 지도가 게재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우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472년 간 왕실의 일상적인 사건과 행사, 정치적 결정, 왕실과 조정의 움직임 등을 기록한 공식 문서이다. 정사를 기록한 만큼 조선시대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등 다양한 측면을 조사하고 분석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조선 전기에 류큐에서 사신은 48 차례나 조선을 방문한 반면, 조선에서는 단 두 차례 사절을 보냈다. 류큐는 적극적으로 교역을 원한 반면, 조선은 소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태도가 바뀐 것은 류큐왕국이 성립된 뒤, 명나라의 책봉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였다.

 

조선왕조실록(출처: KDI 경제정보센터)

 

1. 조선왕조실록의 유구국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왕국을 ‘유구국’(琉球國)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류큐에서 사신이 조선에 자주 찾아온 것은 류큐국에서 조선에 조공을 바치거나 교육이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류큐로 표류하거나 일본에 납치된 뒤 류큐로 팔려간 조선 백성의 송환 때문이었다. 해류와 바람으로 제주도와 전라도에 사는 어민이 표류해 류큐국에 표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기록을 몇가지 살펴보면, 우선 태조 1년(1392년) 12월 28일 당시 쥬산왕 삿토가 태조에 예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실록에는 1416년에 일본에 잡혀간 뒤, 휴큐에 펼려간 조선인의 송환을 위해 이예를 류큐에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2. 세조실록

다음으로 세조실록에는 1422년 3월 28일 오키나와에서 건너온 사신이 병사해 장례를 치러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1423년 1월 10일 세조가 하사한 면포와 외교문서를 가지고 귀국하던 사신단이 대마도 근해에서 왜구로부터 약탈을 당했다고 했다. 조정은 대마도주에 약탈한 물건을 오키나와에 보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1426년 1월 16일 기록에는 조선 백성이 표류할 때마다 송환하고 해마다 조공을 바친 류큐의 정성에 답하는 의미로 사신에게 대장경, 법화경, 금강경, 이백선시 등의 도서와 불경, 특산물을 제공했다고 한다.

 

 

3. 단종실록

한편 단종실록에는 예조가 왕에게 류큐왕국에서 조선인 2명을 송환했다고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1450년에 표류한 조선인을 류큐왕이 후하게 대접했다면서 류큐왕국은 땅이 따뜻해 겨울에도 얼음과 눈이 없고 매년 9월에 파종한 뒤 11월에 묘종을 옮겨 심고 5, 6월에 거둬들이는 기름진 땅으로 이모작이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부모가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고, 평소처럼 고기를 먹으며, 곡을 하지만 슬퍼하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고 장례문화를 기술하고 있다.

 

4. 성종실록

성종실록에 1471년 11월 23일 류큐왕국의 사신에게 종2품 벼슬을 제수했다. 성종실록에는 1477년에 제주도에 사는 김비의가 표류해 류큐에 5개월 이상 머무르면서 관찰한 류큐의 풍경과 풍속을 왕에게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이 처음 표착한 곳은 윤이시마(閏伊是麿)인데, 이는 현재와 다르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지만, 이시가키지마(石垣島)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르면, 주로 벼농사를 하고 있으며, 주거와 의복, 농기구, 장례, 가축, 과일, 채소, 동식물 등을 설명했다. 이외에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거쳤던 섬들에서 보고 들은 모습을 보고했다.

 

성종실록에는 1479년에 류큐에 표류했던 김비 일행이 류큐왕국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류큐왕국의 수도에는 왕과 추장이 있고 문자도 있지만, 일반 백성은 맨발에 문맹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해동제국기

1. 신숙주와 해동제국기

한편 해동제국기에는 류큐국의 지도와 정보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해동제국기를 쓴 신숙주(1417 ~ 1475년)는 집현전 학자로 한글 창제에 참여했지만, 사육신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을 지지했으며, 세조 시대에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에 이어 성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에 재임명되었다. 신숙주는 세종 25년 1443년에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해동제국기는 성종의 명으로 작성해 1471년에 간행되었다.

 

해동제동국(출처: www.archives.go.kr/)

 

해동 여러 나라의 기록인데, 주로 일본과 류큐국을 기술하고 있다. 7개월 간 일본에 머물렀던 개인적인 경험과 외교 관례 등을 정리해 간행 이후에도 중요한 조약 체결과 지도가 보충되었다. 본문은 일본국기(日本國記), 유구국기(琉球國記), 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로 구성되며, 각각 역사와 지리, 역대 지배자, 언어 등을 기술했다.

 

2. 해동제국기의 지도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의 지리, 지도이다. 현존하는 목판본 지도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위치정보는 이전보다 정확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수록된 지도는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와 유구국도(琉球國圖) 등 7장이다.

 

 

해동제국기의 유구국기에는 국왕대서, 국도, 국속, 도리리수 등으 순서로 기술되어 있다. 류큐국의 지도는 포구와 성, 20개 부속 도서와 거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류큐국을 그린 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류큐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북중국해의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확도는 뒷받침하는 예로 ‘고오리지마’를 들 수 있다. 이는 지도에는 군도(郡島)로 표기되어 있는데 현재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

 

해동제국기의 유구국도(출처: 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3. 해동제국기의 유구국

해동제국기에는 류큐는 좁은 땅에 인구가 많으며, 배를 타고 바다를 돌며 해상무역을 생업으로 삼는다면서 교역국이 서쪽에는 동남아시아와 중국, 동쪽으로는 일본, 우리나라에 이른다는 기술이 있다. 수도인 나하(那覇)는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상선들이 모여 들며, 류큐 백성은 수도 주변에서 상점 등을 마련해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신숙주가 사망한 이후인 1501년에 류큐국의 사신으로부터 들은 류큐국의 풍토와 인물, 세대 등을 해동제국기 끝에 기록했다. 또한 권말에 류큐국 어음번역도 추가했다.

 

나오며

이상과 같이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에는 류큐왕국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해동제국기에는 로큐국의 지도가 게재되어 있다. 이들 역사서는 류큐왕국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다음에는 임진왜란 후 류큐국에 끌여온 도공 장헌공 이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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