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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과 오키나와 통치 1, 패전과 GHQ시대 1945년 8월 14일 일제는 패전을 인정하고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통고했다. 다음날 패전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후 9월 2일 도쿄만에 있는 미함대 미주리호 갑판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 전국에서 무조건 항복을 포고한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의거한 요구, 명령을 따른다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을 전국에 명령한다. 공무원과 군 직원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며 비전투적 임무를 수행한다. 일본정부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제한을 받는다. 북위 29도 이남의 남서제도는 미국의 신탁통치에 둔다. 이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이 발효된 1952년 4월까지 7년간 연합군 .. 2024. 3. 23.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④ 끝나지 않은 전쟁 1. 폐허가 된 오키나와 오키나와 전투는 전쟁과 상관없는 오키나와 사람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은 지상전이었다. 제32군 사령관 최후까지 싸우라는 말을 남긴 채 자결해 전투는 패전을 선언한 8월 15일 이후에도 9월 7일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희생자는 20여만 명을 넘었는데 이중 민간인은 12만 명이 넘는다. 오키나와 사람 4명의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자 오키나와는 폐허로 변했다. 1944년 10월 10일 이른바 ‘10・10 공습’으로 나하시에 있는 비행장과 항구 등이 파괴되었으며, 시가지는 콘크리트 건물 이외 대부분 가옥이 소실되었다. 사망자도 다수 나왔으며 시가지 90%가 소실되었다. 이후 나하시민은 북부로 피난갔다.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2024. 3. 21.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③ 전쟁에 내몰린 한국인 1. 들어가며 오키나와 전투는 민간인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은 지상전이었다. 희생자는 20여만 명에 이른다. 이중 일본군 전사자는 6만 6,000명, 미군 전사자는 1만 2,500명이었으며, 민간인은 12만 2,000명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한국인의 희생도 컸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징병자와 군부, 위안부, 학도병 등 적게는 2,800명에서 많게는 1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 강제징용・징병자: 전쟁에 내몰린 한국인 1) 강제징용・징병자 오키나와에 끌려온 한국인은 오키나와 수비군 제32군에 배속되었다. 실제 조선인 징용・징병자수는 제각각이다. 일본정부가 한국정부 전달한 ‘조선인 징용・징병자 명부’(26만 명)를 바탕으로 집계한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조선인은 육군에 3,191명.. 2024. 3. 18.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②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 미군 상륙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미군은 일본군과 오키나와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 미군은 1945년 3월 26일 오키나와 본섬 서부의 케라마(慶良間)제도에 상륙했다. 함대 정박지를 확보한 뒤, 4월 1일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손과 카데나에서 상륙작전을 시작했다. 이곳은 일본군의 비행장이 있는 곳이었다.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한 미군은 54만 명이었으며, 이중 18만 3,000명이 상륙했다. 미군은 다량의 함선과 포탄 11만 발을 발사하며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11만 명이었으며, 이중 오키나와에서 모집한 징집병과 학도병이 2만여 명이었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은 오키나와가 일본군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일본군과 남태평양, 중국 방면의 연결통로였다. 미군.. 2024.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