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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① 전쟁의 시작 1. 모순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잔혹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1879년 오키나와를 강제 편입한 일제는 동화정책을 밀어붙였다. 일본어를 보급시키고 창씨개명을 단행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일본에서 부르는 태평양전쟁에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제2차 세계전쟁 말기에 오키나와는 미군과 일본군간에 치열한 지상전이 벌어져 20만명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 이중에 절반이 오키나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 본토에서 분리돼 미군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서냉전시대에 오키나와에는 대규모 미군기지가 건설되었다. 중국을 방어하는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와 함께 토지마저 빼앗겼다. .. 2024. 3. 15.
오키나와 언어 이야기 1. 서론 오키나와에는 '우치나구치'(うちなーぐち)라는 방언이 있다. 오키나와어, 류큐어 등으로 부리는데, 이는 본섬과 주변 섬에서 사용된 말이다. 류류왕국의 멸망과 함께 오키나와어도 일본어에 동화되었다. 한편 한글의 영향을 받은 단어도 있다. 오키나와의 방언과 한글의 영향을 정리한다. 2. 오키나와의 방언들 1) 6개 방언의 소멸 위기 일본에는 모두 8개의 방언이 존재하는데 그중 6개가 오키나와 지역의 방언이다. 홋카이도 주변의 아이누족(アイヌ族)이 사용하는 아이누어, 태평양에 있는 하치죠지마(八丈島)에는 하치죠어가 있다. 나머지는 오키나와 지역에서 사용되는 방언인데, 아마미어(奄美語), 쿠니가미어(国頭語), 오키나와어(おきなわ語), 미야코어(宮古語), 야에야마어(八重山語), 요나구니어(与那国語)이다... 2024. 3. 13.
오키나와 류큐왕국 삼별초 홍길동 1. 들어가며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에는 오키나와 관련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류큐왕국의 정치와 문화,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과 류큐왕국은 교류가 빈번했다. 특히 장헌공은 오키나와에 도자기 기술을 전수했으며, 이는 류큐자기(도자기)를 발전했다. 역사적 기록 이외에 확인되지 않은 부분도 남아 있다. 오키가와가 삼별초나 홍길동전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은 추측의 영역에 속하며 고증이 필요하다. 2. 오키나와와 삼별초 1) 삼별초: 난인가 항쟁인가 삼별초와 오키나와 삼별초의 항쟁 13세기 말에 고려는 원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게 된다. 삼별초는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다. 원래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으로 군부정권의 호위병이었다. .. 2024. 3. 12.
류큐왕국과 슈리성 1429년에 성립된 류큐왕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된 1879년까지 450년간 왕정체제를 유지했다. 수도는 나하이며, 왕궁은 슈리성(首里城)이다. 슈리성은 오키나와 여행자라면 대부분 들르는 명소이기도 하다. 류큐국 만큼이나 고난을 겪은 슈리성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왕궁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번에는 슈리성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한다. 류규왕국의 왕궁 슈리성 류큐국의 왕궁인 슈리성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한 문헌을 남아 있지 않다. 최근 발굴조사에 따르면, 14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건물 흔적이 발견되었다. 14세기 말은 아직 류큐국이 성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삼국시대, 즉 산잔(三山) 시대의 유물로 보인다. 당시는 구스크(グスク) 시대로 삼국이 경쟁하는 시대였으며, 많은 성곽이 세워진 시기.. 2024.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