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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7

오키나와 반환과 밀약 1. 오키나와 반환 1.1. 반환운동 미군정의 토지 몰수에 대항해 오키나와 주민이 단결해 대항한 ‘시마구르미’(島ぐるみ) 투쟁 이후 일본 복귀운동이 거세졌다. 패전 당시에는 미국에 귀속을 원하는 여론과 오키나와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일본 복귀가 지배적인 여론이 되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베트남 전쟁이 터지자 출격기지와 후방지원기지로 변했다. 이후 오키나와에는 막대한 달러가 유입되었으며, 특수를 누리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오키나와가 다시 전쟁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터져 나왔다. 특히 1965년 이후 미 폭격기 B52가 태풍을 이유로 괌에서 카데나(嘉手納)로 옮겨 직접 출격하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카데나가 베트남으로 출동하는 전투기의 출격기지가 되었다... 2024. 3. 26.
미군정과 오키나와 통치 1, 패전과 GHQ시대 1945년 8월 14일 일제는 패전을 인정하고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통고했다. 다음날 패전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후 9월 2일 도쿄만에 있는 미함대 미주리호 갑판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 전국에서 무조건 항복을 포고한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의거한 요구, 명령을 따른다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을 전국에 명령한다. 공무원과 군 직원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며 비전투적 임무를 수행한다. 일본정부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제한을 받는다. 북위 29도 이남의 남서제도는 미국의 신탁통치에 둔다. 이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이 발효된 1952년 4월까지 7년간 연합군 .. 2024. 3. 23.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④ 끝나지 않은 전쟁 1. 폐허가 된 오키나와 오키나와 전투는 전쟁과 상관없는 오키나와 사람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은 지상전이었다. 제32군 사령관 최후까지 싸우라는 말을 남긴 채 자결해 전투는 패전을 선언한 8월 15일 이후에도 9월 7일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희생자는 20여만 명을 넘었는데 이중 민간인은 12만 명이 넘는다. 오키나와 사람 4명의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자 오키나와는 폐허로 변했다. 1944년 10월 10일 이른바 ‘10・10 공습’으로 나하시에 있는 비행장과 항구 등이 파괴되었으며, 시가지는 콘크리트 건물 이외 대부분 가옥이 소실되었다. 사망자도 다수 나왔으며 시가지 90%가 소실되었다. 이후 나하시민은 북부로 피난갔다.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2024. 3. 21.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③ 전쟁에 내몰린 한국인 1. 들어가며 오키나와 전투는 민간인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넣은 지상전이었다. 희생자는 20여만 명에 이른다. 이중 일본군 전사자는 6만 6,000명, 미군 전사자는 1만 2,500명이었으며, 민간인은 12만 2,000명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한국인의 희생도 컸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징병자와 군부, 위안부, 학도병 등 적게는 2,800명에서 많게는 1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 강제징용・징병자: 전쟁에 내몰린 한국인 1) 강제징용・징병자 오키나와에 끌려온 한국인은 오키나와 수비군 제32군에 배속되었다. 실제 조선인 징용・징병자수는 제각각이다. 일본정부가 한국정부 전달한 ‘조선인 징용・징병자 명부’(26만 명)를 바탕으로 집계한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조선인은 육군에 3,191명.. 2024. 3. 18.